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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전문 지식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의 전환을 이야기하다

by 그로잉타임즈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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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은 2000년 가까이 유럽사람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을 지배해왔다고 설명했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실제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은 수백년의 단절 끝에 12세기 르네상스를 통해 부활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우주론은 당시 중세 유럽을 지배하던 기독교 세계관과 쉽게 융화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한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교회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도미니코 수도회를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점차 수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독교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결합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중세 유럽의 학문적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전성기 스콜라철학 체계다.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융합된 스콜라 철학의 권위에 반기를 든 혁신 운동이 바로 16~17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이다. 이는 기존 학문을 쇄신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 자연관의 핵심을 이루던 코스모스의 개념을 무너뜨렸다. 과학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과학사학자 알렉상드르쿠아레는 논문 갈리레이와 플라톤에서 이 혁명이야말로 그리스 사상에 의해 코스모스가 발명된 이래로 인간 사상에 관한 대단히 깊이있는 혁명 중 하나다라고 평했다.

 

또한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는 대과학의 탄생에서 그것은(과학혁명) 기독교 출현 이래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이에비하면 르네상스나 종교개혁도 중세 기독교 세계의 단순한 일화일 뿐이며 내부적인 교체극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즉 과학 혁명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상으로 근대 세계로 향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삭너이었다는 말이다.

 

과학혁명은 유럽을 중심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말까지 거의 150년 동안 벌어진 지적 변혁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간행함으로써 시작됐으며 뉴턴의 프린키피아 간행으로 끝을 맺었다.

과학혁명이 시작된 계기는 우주론의 전환, 즉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지구중심설)대신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주장한 사건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연관의 뼈대를 이루는 고대 천문학 이론은 첫째 하늘과 땅의 구별, 둘째 천구의 존재, 셋째 일관된 원운동이라는 세가지 중심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하늘과 땅의 구별이라는 첫 번째 원리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존재와 일관된 원운동이라는 두 번째, 세 번째 원리를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 대지를 움직인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말그대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만한 주장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계에 대해 품은 가장 큰 의문은 일관된 원운동이라는 원칙을 무시했다는 점이었다. 앞서 봤듯이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의 불규칙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이심원, 주전원, 동시심 등의 기교를 도입한 바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앞서 저술한 짧은 해설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냐면 이들 이론(주전원설)은 동시심 몇 개를 추가로 가정하지 않으면 불완전했기 때문이며 또한 동시심 때문에 별은 대원상에서도 고유의 중심에 대해서도 늘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느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변(순수한 논리적 사고만으로 현실 또는 사물을 인식하려는일)은 완전하지 않으며 이성과 일치한다고도 볼 수 없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붙인 서문에서도 이심원을 도입한 것은 운동의 일관성에 관한 첫 번째 원리와 모순되는 일이며 그 결과 우주의 형태와 우주 여러 부분에 관한 확고한 균형을 발견하는데 실패했다고 평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비판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첫 번째 동기는 일관된 원운동이라는 원리를 준수함으로써 우주의 조화와 질서(코스모스)를 회복하려 한 일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일관된 원운동과 함께 천구의 존재라는 전통적인 개념도 유지하려 했다는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주전원가 미세 주전원이 계속 추가됐기에 천구의 개념과 실질적 의미가 유명무실해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움직임으로써 행성 천구가 단순하게 배열되도록 했고 우주의 체계와 질서를 통일성있게 나타냈다. 이것은 그가 보기에 만물의 쵯너이자 가장 규칙적인 제작자(즉, 신)의 의도에 맞는 형태였다.

 

그런데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편집을 담당한 루터파 신학자 오시안더는 독자에게 라는 제목으로 서명하지 않은 서문을 첨가했다. 그 내용은 이러한 여러 가설이 진실일 필요는 없고 진짜 같지도 않으며 오히려 관측 결과에 맞는 계산을 할 수만 있다면 충분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지동설은 수학적 허구이며 계산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물론 코페르니쿠스 본인의 지동설을 우주의 진짜 모습을 나타내는 실제적 이론이라 생각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오시안더의 서문은 신학자들의 반발을 우려한 방어적인 반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전원을 80개나 써야 하는 복잡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비해 지동설은 이론적으로 무척 단순했기에 달력을 작성할 때 필요한 천문학적 계산을 대단히 간략하게 할 수 있었다. 이 점이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는데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을 눈여겨 봐야 한다.

 

어쨌든 코페르니쿠스는 일관된 원운동과 천구의 존재라는 전통적인 원리에 충실했기에 하늘과 땅의 구별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원리를 폐기한다는 대담한 이론을 제기할 수 있었다. 쿠아레는 이러한 일관된 원운동에 대한 집착을 원의 마력이라고 불렀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전통적인 원의 마력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기에 되려 과학사상 보기 드문 혁신을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일은 전통과 혁신의 복잡하고 역설적인 관계를 시사하기도 한다. 

 


원의 마력에서 벗어나다, 케플러

 

코페르니쿠스도 벗어나지 못했던 일관된 원운동과 일관된 천구의 존재라는 두가지 원리를 폐기하고 근대 천문학의 길을 연 사람은 바로 요하네스 케플러였다. 케플러는 튀빙겐대학교에서 메스틀린에게 천문학을 배웠으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 매료됐다. 이때 케플러는 태양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600년에 케플러는 프라하의 튀코 브라헤를 찾아가 그의 조수가 됐다.

 

이 만남은 케플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왜냐면 당시 브라헤는 육안에 의한 천체관측에서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하는 천문학자였다. 그 정밀한 관측 데이터가 훗날 케플러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브라헤 본인은 이론에 대해 보수적이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절충안을 제시하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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